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압둘라 알마흐디 (문단 편집) === 리비아 정복 === 쉬아 칼리파 국가를 칭한 파티마 조의 목표는 비록 쇠퇴하였지만 아직까지 강한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수니파의 보편 칼리파를 멸하는 것이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그 심장부인 이라크로 진격해야 했고 또 이라크로 가기 위해선 이집트 장악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현재 튀니지 일대에 자리한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로 진군하기 위해선 우선 리비아를 평정해야 했다. 우선 리비아 서부 지방인 [[트리폴타니아]]는 아글라브 조의 멸망 이후 파티마 조에 복속하였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트리폴리의 반란은 쉽게 진압되지 않았고 913년 6월, 마흐디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 카임]]이 수륙 양면으로 도시를 포위한 끝에 항복시키며 진정되었다. 이후 트리폴리 총독으로 부임한 쿠타마 베르베르 군대의 장군 하바사 이븐 유수프는 6개월간 이집트 침공군을 준비한다. 이미 911년부터 쿠타마 베르베르 군대는 리비아 서부인 키레니이카 일대를 약탈하고 있었다. 914년 1월, 1차 이집트 원정군이 트리폴리를 떠나 해안선을 따라 동쪽으로 나아갔다. 리비아 중부의 [[시르테]]와 키레나이카의 관문인 아즈다비야는 전투 없이 항복하였고 리비아 동부의 핵심 도시인 [[바르카]]도 2월 6일에 점령되었다.[* 이스마일파 측의 주장에 의하면 압바스 조 당국이 바르카 시민들을 소개시켜 원정군이 무혈입성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수니파 기록에 의하면 파티마 군대가 시민들을 학살하고 상인들의 재산을 압수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리비아 대부분이 파티마 조의 수중에 들어온다. 비옥한 [[키레나이카]]의 정복으로 매년 2만 4천 디나르의 토지세와 크리스트교도 공동체 (딤미)의 [[지즈야]], 무슬림들의 [[자카트]]를 합쳐 1만 5천 디나르의 추가 수입이 파티마 조의 세수에 포함되었다. 한편, 수니파측 기록에 의하면 알 마흐디의 리비아 통치는 잔혹하였다고 한다. 바르카에서의 학살 외에도 압바스 당국과의 연락 가능성을 이유로 상인들로 하여금 소유한 연락용 비둘기들을 모두 먹어치우게 하였고, 지역민들을 강제 징용하였으며 그에 응하지 않은 주민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했다는 것이다. 그외에 9년전 이동 중이던 마흐디 (압둘라)의 일행을 습격하여 도적질을 한 베르베르계 마자타 부족의 족장 2명과 그 아들들을 처형하고, 여자들은 노예로 팔고 재산을 압수하였다고 한다. 다만 당시 사회에서 정복자가 피정복자에 대해 취한 태도로 볼때 그정도는 심각히 가혹한 편은 아니며 이후로 리비아에 대한 파티마 조의 통치가 안정적으로 이어진 것을 보았을 때에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